Web Search/Synergy2010. 8. 19. 18:08

안녕하세요, UC버클리 총장 로버트 버제노입니다. 물리학, 물성물리학, 엔지니어링 교수이기도 합니다. 이런 매우 특별한 행사에서 여러분을 환영하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오늘 Zellerbach Hall을 가득 메워주신 여러분과 이 행사를 webcast로 보고 계시는 매우 많은 분들도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들 중 한 분이신 42대 대통령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전 대통령이 버클리 대학에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하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연설을 자신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로써 그리고 그들의 대학생활 중 가장 감명 깊은 순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2002년 그의 버클리대학 방문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10대 초반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 티켓은 5분 만에 재빨리 팔렸습니다. 확실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동기부여 하는 능력은 그의 대통령 임기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의 마음을 끌고 격려하는 방식으로 연장되어 왔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제가 개인적으로 영감을 받은 지도자입니다. 그의 2번의 임기- 1993년부터 2000년까지 8년의 행정업무-는 미국의 평화와 경제적 행복의 시기로 일컬어집니다. 아메리카 합중국은 강한 경제와 진정한 사회 발전 기간으로 즐거웠습니다. 실업, 가난 그리고 범죄 비율은 낮아졌고, 대학 등록 비율은 높았습니다. 의료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바마 대통령이 이 중대한 사안을 계획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업적에는 전 세계에 걸쳐 평화를 증진한 것과 민주주의를 강화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버클리 대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공평, 포함 그리고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백악관을 떠난 이래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선활동에 자기 자신을 헌신했고, 클린턴 재단을 통해 공익사업을 계속했습니다. 재단의 주요 목표는 세계적 상호 의존의 도전에 직면한 전 세계 사람들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그는 오바마 대통령에 초대되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과 함께 아이티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를 복구하고 그들의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을 도와주는 데 앞장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지친 기색 없이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헌신에 감명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중요한 공공의 가르침이고, 버클리대학과 같은 연구대학이 대중들에게 주는 좋은 점입니다. 우리는 평화단체 자원봉사자의 수가 많음으로써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예가 되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좋은 의도를 긍정적인 행동으로 되게 하는 세계적 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우리 캠퍼스 DNA에 깊게 울려 퍼집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위한 Blum Center’의 초대로 캠퍼스에 돌아왔습니다. 실용적인 방법으로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Blum Center의 목표들은 클린턴 재단의 긴급 행동, 해결책 그리고 측정 가능한 결과를 요구하는 사안들에 중점을 두는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Blum Center는 제가 버클리 대학 동문인 Richard Blum, UC Regent와 인간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일에 전념하는 자선가와의 대화의 결과로 2006년 3월에 설립되었습니다. 발전하는 세계 속에서 가난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Dick의 열정에서 나온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지식과 우리 교수진의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전문 기술 그리고 세계적인 가난 속에서 투쟁하면서 우리 학생들이 겪은 생생한 경험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우리 학과장님과 교수님들께서는 열정적으로 응해주셨습니다. Dick의 아이디어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너그러운 성격은 다른 훌륭한 지지자들을 사로잡았고, 결국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흥미와 갈망은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에 영향을 주고 운이 없는(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버클리의 헌신은 센터가 주목받고 굉장한 성장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센터 교수단의 총책임자로 계시는 S. Shankar Sastry는 우리 학교 공과대학 학과장이신데, S. Shankar Sastry 지휘 하에 이 센터는 또한 UC Berkeley, UC Davis, UC San Francisco and 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에 걸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 시민들 중 신세대들이 개발도상국들의 어려운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게 효율적이고 매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돕도록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줍니다. 우리는 ‘경제발전을 위한 Blum Center’가 우리에게 오늘 클린턴 전 대통령으로부터 듣는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클린턴 전 대통령을 소개하실 Richard Blum을 소개하겠습니다. 
 
[박수] Bob, 당신의 친절하고, 사려 깊고, 관대한 발언 감사합니다. 제가 클린턴 전 대통령을 소개하기 전에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제가 3년 동안 Regents of UC 이사회의 의장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의장이 되었을 때, 저는 대학의 개혁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관료체제의 크기를 줄이고, 역동적으로 만들자고 말입니다. 이는 대학교의 학술적인 임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 당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으로부터 자필로 쓴 편지를 받았을 때 아주 놀랐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Dick, 저는 California Regents에서 한 당신의 연설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대학교들은 행정적으로는 앞서 나가있지만 전략적인 투자는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우리의 대학교들이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장점을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는 우리의 미래에 필수적인 겁니다.” 그가 경쟁력 있는 장점을 얘기했을 때, 그는 여러분들 모두를 지칭했던 겁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매우 분명하게 세계를 만드는 도전에 대한 그 날을 얘기했습니다. 매우 가난한 국가들의 사람들이 교육과 혁신, 기회를 통해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분투할 수 있는 세계를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미국인으로써 우리의 기금과 신생국가가 성장, 번영하고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대사(ambassador)가 되고 인적자본은 committing함으로써 모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했습니다만, 여기 버클리 대학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제가 들어 본 것 중 가장 호소력 있게 외교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그 때와 같은 장소인 여기에 있을 겁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틀림없이 증명해왔습니다. 그가 단지 자신이 말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것을 운영한다고 말입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이후로부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를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프로젝트에 쓰일 수백억 달러를 모아 왔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CGI는 570억 달러 가치의 1700 commitment를 받아 왔고, 170개의 다른 국가들에 살고 있는 2억 2천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수] 매년 9월 뉴욕에서의 그의 CGI 모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난, 의료 서비스, 환경 문제,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전 세계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몇몇의 사람들은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가 다보스와 약간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CGI는 단순히 생각 덩어리로 이루어진 탱크가 아닙니다. 그것은 행동을 하는 기계입니다. 우리 모두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 힘든 기색 없이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 피해자들을 위해 도움을 보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건에서도 일을 해왔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현재 지진의 여파로 피해를 입은 아이티 주민은 돕는 유엔 특별대사로 있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완전히 다 소강되지 않았는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진이 발생한 뒤로 2번이나 더 아이티를 찾아갔습니다. 
버클리 대학에서 우리는 3년 동안 있으면서 ‘경제발전을 위한 Blum Center’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2500명의 학생들이 우리 수업을 경험했습니다. 220명의 버클리 대학 아이들은 작년 여름에 28개 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와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막 가나와 수단에서 돌아왔습니다. 저는 저번 주에 Darfur(수단의 서쪽에 있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Darfur 난로는 전통적인 것이 그러하듯 1/3의 많은 숲이 탔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타는 것을 찾고 위험에 처하기 위해서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외선 정수기는 현재 글자 그대로 깨끗한 물을 아시아, 아프리카, 특정 인도지역에서 사는 수 십 만의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우리는 우리가 서부 해안 친척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부인 Diane Feinstein과 저는 워싱턴에서 17년 이상을 살면서 모든 친척들 중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훌륭하신 국무장관이신 힐러리 클린턴 장관보다 더 존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박수] 저는 지금 저의 훌륭한 친구를 소개하려 합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42대 대통령이셨던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전 대통령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2월 24일, 미국 42대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버클리대학에 방문하여 세계적 시민권이라는 주제로 특강.

<빌 클린턴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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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감사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도입부를 맡아 주고, Blum Center가 세계 인구 중 약 절반이 하루에 2달러 이하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해 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저의 훌륭한 친구 Dick Blum에게 매우 감사합니다. 또한 제가 버클리 대학에 다시 온 것을 환영해주신 Birgeneau총장님도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에 온 것이 매우 기쁩니다. 저는 제가 이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연설을 한지 벌써 8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매우 놀랐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절대적으로 명료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지 여러분들이 언제 그것을 했다는 것인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나 저는 여기에 와서 기쁩니다. 저는 8년 전 그날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21세기 세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무엇인지 말하려 노력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 당시 제가 만들었던, 하지만 이 새로운 10년으로 업데이트 된 중점들 중 몇 개를 짧게 반복하려 합니다. Blum Center와 세계적으로 한 업적, 제 재단이 미국과 세계적으로 한 업적은 21세기 초기 가장 희망적인 발전사항들 중 2가지를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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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제가 앞으로 언급할 공산주의자들의 등장입니다. Not necessarily a more leftwing philosophy but a more embracing one. 꼭 좌익 철학은 아니지만 포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상호의존적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있으면, 우리는 기회를 공유 혹은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값을 지불할 것입니다. 우리는 상호의존적이니까요. 단절은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수록, 다른 사람도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이에 대한 심오한 해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관중들을 둘러본다면 그저 다양성의 수준에 있지 말고 우리나라의 구석, 구멍에 있길 바랍니다. 비정부적 조직들의 등장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NGO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조직이지만, 미국에는 공동체의 기반을 둔 일을 하는 모든 종교계의 35만 5천개의 종교적 기관을 세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100만의 NGO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이에 관해 저는 몇 분 더 얘기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100만 아니 지금은 100만 이상의 NGO들이 인도에서 일하고 있고, 약 그들 중 반은 인도인들이 일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외국인들이 일을 합니다. 중국에는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30만 명의 러시아인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인도 아대륙 특히 방글라데시에서 마이크로크레딧(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무상으로 소규모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자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에 열중하는 엄청난 NGO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동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비 정부적 활동의 폭발적인 증가를 말이죠. 저는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정부적인 시민 행동의 미를 극찬함으로써 정부와 정부의 정책이 중요하지 않다는 제 생각을 넌지시 내비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조금 있다가 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얘기해봅시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비정부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because this world, for all of its joys, and 그리고 다양성이 늘어나고, 인터넷 때문에 의사소통 방식이 다양해지고,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정보를 얻는 방식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때입니다. 제가 1993년에 당선 되었을 때, 그 때가 암흑의 시대라 일컬어졌었는데, 제가 취임했을 때 월드 와이드 웹에 총 합쳐서 50개의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보다 더 많이 사이트가 추가 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취임선서를 하는 날, 휴대 전화의 평균 무게는 5 파운드(약 2.3kg)였습니다. 지금 저는 제 이 큰 손에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는데, 저는 여전히 매번 3개의 버튼 중 하나를 잘못 누릅니다. 여기에서 훌륭한 일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공산주의자의 반대의 목소리에 맞닥뜨리게 되는 현대세계의 매우 심오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부유국가와 빈곤국가 사이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또한 국가 내에서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절반의 사람들은 하루에 2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고 있고, 10억 명의 사람들은 하루에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현재 일하고 있는 아이티의 75%의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하루에 2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10억 명의 사람들은 깨끗한 물에 접근조차 못해봤습니다. 25억 명의 사람들은 위생에 접근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당연시 여기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여기의 공기 정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면, 모든 불빛이 꺼지고 서로를 볼 수 없다면 혹은 음향 시스템이 작동이 안 되어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충격을 받을 겁니다. 저는 지금 제 시간의 많은 부분을 기회의 불평등 때문에 이것들을 당연시하다고 여길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일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아이티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첫 번째의 의료 문제는 즉각적 비상사태가 끝나고 한밤중에 보드카와 금속 절단용 쇠톱으로 절단을 하고 난 뒤에, 아무 공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첫 번째 문제는 위생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임시 정착지에서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진 이후에 (아이티 주민들을) 도우려고 했을 때, 제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비록 그 일이 있기 1년 전부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compost toilets를 포함한 변소를 만드는 어느 누구도 자연 재해로 될 남은 생산 능력을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세계에서 재능 있는 많은 NGO들이 큰 변소를 파는 방법을 알거나 혹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한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부자와 빈자 간의 격차 때문에 모든 종류의 것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거나 혹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속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의료 서비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년에 이 지구에서의 자연재해, 전쟁, 전형적인 심장질환과 암, 폭력과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1/4과 에이즈, 패결핵, 말라리아,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의 1/4은 오수, 콜레라, 이질, 설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에이즈, 패결핵, 말라리아,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의 80%는 5살 미만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말을 해야 제가 왜 아이티의 위생 상태를 걱정하는 지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물웅덩이를 잘린 발로 밟으며 임시 정착지로 걸어가는 어린 아이들은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 질병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입니다. 여러분들은 에이즈로 죽은 사람을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 원인은 그들의 약이 미국에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치료 제도에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이고 세계 불평등의 징후입니다. 우리들은 아이티에 다시 학교들이 설립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1억 3000명의 사람들은 전혀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그 정도는 학교에 가지만 명목상입니다. 즉, 선생님들은 훈련받지 못했고, 배움이라는 것을 접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 국가에서 단지 1년 학교 교육을 했는데 생계를 위한 수입 능력이 년 10%가 증가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조금 있다가 더 많은 얘기를 하겠지만,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이 우리 시대의 경제적 조건 때문에 어느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공격에 의해 발전되어왔던 질 좋은 공교육 제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같은 의사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거기에 있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 여러분들이 한 번도 학교에서 하루 동안 있어보지 않았을 때 생각해볼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는 전적으로 너무 불평등합니다
세계가 갖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상호의존성의 의미는 다른 것들 중에서 단지 단절이 경계를 차지하지 않는 옵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을 통해 무엇을 보낸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이 아니면요. 경제 위기로 인해 나타나게 된 상호의존성에 대해 보도록 합시다. 그것은 미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생각하길, 아마도 우리 은행통장을 봐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나타나고, 아일랜드에서 나타나서 결국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레버리지(기업 인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기에 퍼집니다. 그러고 나서 작은 영어 마을의 이 작은 연금들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원인으로는 그들 모두가 영국, 아일랜드, 미국에서 HLI에 의해 보장되어진 비율보다 높은 수익률이 보장된 아일랜드의 금융상품에 투자했다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가 붕괴 되고나서 정부 전체가 기진맥진해졌고, 아름다운 작은 지역의 명성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록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유럽 국가들 중에서 자금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정보기술과 마케팅 기업을 시작으로 높은 비율의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를 만들어내는 유럽 국가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은 그들이 새롭게 일을 벌려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샀는데도 재무위기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죠, 갑자기 3500만 명의 실업자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유럽 사람들이 그들의 생산품을 더 이상 많이 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세계 주위 저 멀리에 있는 펜팔이 있는 것과 같은 상호 의존성의 징후입니다. 
9 11 테러 이전에 알 카에다는 직접 비록 목표는 미국 대사관이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었던 테러가 일어난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자신들이 테러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예멘에서 배를 폭파하고, 스페인에서 시작하고, 영국, 발리 그리고 인도에서도 테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들이 동의를 하는지 안하는지 간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 장벽 없는 지역으로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증명된 영리한 적수의 심리적 불안정을 통제하도록 시도하고, 그들을 조직하고 처음부터 오랫동안 일을 꾸며오는 정보기술을 사용하라고 소리를 보내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매우 불안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우리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 때문에 지속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독립적이고 이 패턴 속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중국은 온실 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국가입니다. 하지만 호주는 기후 변화에 매우 큰 타격을 준 첫 번째 국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극적인 증가를 산불과, 작물을 성장시키고 가축과 다른 지역의 종류의 것을 기르는 능력이 감소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몇 달 전, 한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그 연구에 따르면, 기후 변화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 국가들은 기후 변화에 가장 작은 기여를 한 적도에 위치해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 빈곤 국가들이라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아이티와 같은 곳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또한 상호의존성의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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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제가 여기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지만)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배출한 새로운 에너지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미묘한 과학은 변하지 않았다고 추정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느 사람이 East Anglia 대학에서 몇 개의 이메일을 훔치고, 범죄를 저지릅니다. 만일 그들이 기후 변화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면, 이 절도를 극찬하는 관중들은 그들을 감옥에 가둬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메일을 훔쳐서 의도적으로 약간 바꿔서 기후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연구가 보이도록 합니다. 비교적 작은 실수는 UN의 기후변화 정부 간 위원회에 의해 발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연한 것이고, 그들은 마치 히말라야 빙하가 언제 녹을지 정해져서 어느 사람들이 히말라야 빙하가 녹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 그거 별거 아니야. 2035년이 아니고 2039년이야. 다시 잠자러 가자.' 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만, 그 생각을 갖고 계세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길 정보가 현대 사회와 소통하고 있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들 중 하나는 만일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가벼운 것을 전공할 것입니다. 중대한 것을 전공해야 하는 때에 말입니다. 저는 제가 봐오고 읽어왔던 모든 것들이 1995년 이래로 10년 동안 계속 더웠다는 사실에 관해 중대한 문제로 불려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상원에서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 1명 이 최근에 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온난화는 거짓말이라고 명백하게 말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워싱턴에서 기록적인 수치로 폭설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웃음] 저는 중국과 인도 여러 곳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세계의 일반적 기준인 워싱턴DC에서 발생한 것을 기반으로 추정할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웃음과 박수] 당신들은 심지어 미국의 일반적 기준을 기반으로 해서 추정할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2월에 매우 추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월에는 어느 1월 때보다 매우 따뜻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잘 잊어버립니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워싱턴DC가 얼마나 추운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동안, 올림픽이 밴쿠버에서 열릴 때 첫 주 때 큰 문제 중 하나는 눈이 충분히 없어서 눈이 녹아 질퍽거린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몇몇 행사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틀을 갖고 있으면 합니다. 세계는 매우 좋지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지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생 내내 계속 하기에는 이 패턴은 매우 불공평하고 급변하고 지속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할 중요한 일은 상호의존성의 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저의 위치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정확한 필터를 가졌다고 확신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질문이 무엇이든지 저는 아래의 질문을 생각할 것입니다. :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해줄까, 혹은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켜줄까? 만일 그러면 나는 찬성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한다. 라는 질문에 말이죠. 그러고 저는 지금 제 인생을 그것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의견입니다.  
이제, 사회 의존성의 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화고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키는 데에 시민, 대학생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저는 여러분의 흥미, 능력, 역량에 따라 세계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비정부적인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여기 미국에 100만의 비정부 기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시민단체의 전통은 사실 우리나라보다 오래되었습니다. 밴자민 프랭클린은 헌법을 비준하기 전에 미 연방국에 처음으로 의용 소방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설립한 도시인 필라델피아에도 의용 소방대를 조직했습니다. de Tocqueville이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썼을 때, 그는 19세기 초반에 미국과 그 이전 정부가 폄하하는 식으로 오래된 유럽이라고 부른 유럽과의 차이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차이점은 만일 정부가 유럽에서 약간의 필요를 응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불평하고 정부가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길, 미국에서는 그것에 대해 하루 이틀 불평하다가 그냥 집에 가서 조직하고 문제를 고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좋아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대략적으로 정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데 적용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점은 우리는 항상 서로 자신들의 일만 하는 것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계적인 현상이 됩니다. 제가 처음에 어떻게 이 모든 비정부적인 운동이 세계를 휩쓰는지 말했습니다. 아이티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큰 도전들 중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시도하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룰 때, 우리들이 최소한 공공 의료와 좋은 교육에 관한 특정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금 거기에 있는 모든 비정부기구들이 어떻게 협력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그들의 일과 미국과 다른 이들이 하고 있는 일 뿐만 아니라 세계 식량 계획, 유니세프 그리고 모든 다국적 단체들과 일치를 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제 재단에서는 가장 싼 AIDS 약을 지금 70개 국가에 팝니다. 그리고 의료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을 30개 국가에서 하고 있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경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미국에서 의료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 비만에 반대하는 캠페인입니다. 그것은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맡고 있는 것이고, 저는 영부인께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막 로스엔젤레스를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주지사인 슈왈제네거, 저,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모든 학교에서 온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어린이 비만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얘기했습니다. 그것에 미국에서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한 공공 의료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부자와 빈자에 대해 얘기를 해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어린이 비만입니다. 지진으로 황폐화된 아이티에서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인 위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되돌아 갈 하나의 요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가난한 국가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능력 부족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똑똑하고,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단지 몸과 정신을 함께 모아두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의 예측가능성을 주는 것과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 우리가 행사하는 노력 그리고 우리가 얻는 결과물 사이에서 관련성을 갖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조직화된 구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꿈을 이루고 살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기회가 있는, 그리고 여러분들이 계속적으로 불평등과 불안정의 힘을 쓰러트리는 조화롭고 일관된 사회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유한 국가에서의 문제는 그것과 반대의 것입니다. 기관에 대단한 능력도 있고 거대한 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말이죠. 부유 국가의 문제는 경직입니다. 기관은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 그들의 힘, 그들의 영향, 그들의 부에 익숙하게 성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저항합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세워지도록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허락하는 변화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경제 시스템, 우리의 재정 규제 시스템, 우리의 의료 시스템, 교육 시스템 그리고 우리가 생산하고 에너지를 소비하고 일반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경직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킬 때, 제 생각에는 여러분들이 '이게 경직이라는 문제야? 왜 우리가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거야?' 라면서 미국을 분석할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관을 변화에 저항하는 악마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좋은 일들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 설립된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 지금 현재의 파이를 그들의 몫으로 보호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것은 정부 그 자체가 오래된 만큼의 경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는 인간의 심리학에 의해 복잡해진 심오한 도전입니다. 15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모든 인간의 일에 있어서 먼저 설립된 규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렵지 않은 것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인용문을 끝내기 위해 구어체로 되돌아갑니다. 즉, 이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하겠습니다. 그는 정확히 이것처럼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와 같습니다. 그것이 그러한 이유는 어느 변화가 제안이 되면, 질 사람들은 그들의 패배를 확신합니다. 하지만 얻을 사람들은 그들의 장점을 확신하지 않고, 의료에 관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지켜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경직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티, 그들은 능력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능력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빈곤 국가에서도 능력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지역에서 시민들은 공공 정책 변화와 같은 정당한 것을 지지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비정부적 조직을 통해 일을 함으로써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 예를 주겠습니다. 제가 이 에이즈 지역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에이즈를 치료할 약을 살 돈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의 PEPFAR 프로그램(에이즈 구제를 위한 대통령 긴급 계획)은 제대로 틀이 잡히지 않았었고, HTB와 말라리아의 세계 기금이 모아지지도 않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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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희는 저소득층 의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 혹은 저소득층 의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에이즈를 치료하는 약값으로 매년 10,000달러를 미국 납세자들에게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유전적 의약품은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널리 생산되었기 때문에 1년에 500달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 가격이 싸게 느껴지지만, 만일 여러분들이 1인당 하루 소득이 1달러 미만인 나라에서 산다면 500달러는 큰 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정부가 돈을 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입을 벌어들일 능력이 없다면, 즉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없다면, 500달러는 큰 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예를 다시 볼 때, 이는 비정부적 기구가 정부적 단체가 보통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심지어 1년에 500달러의 복용량으로도 이 일이 아래의 모델: 적은 양, 불확실한 월급으로 운영되어졌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국가들은 돈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높은 수익차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국가)은 영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들에게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이는 비정부적 기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말했습니다. '이보세요! 너희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건 어때요?'. 저희에게는 아일랜드와 캐나다를 시작으로 여러분들이 약을 사는 데 비용을 줄 국가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저희가 가난한 국가들에게 돈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인도와 남아프리카에 있는 제조공장에 요구했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당신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적은 양에서 많은 양으로, 불확실한 월급에서 확실한 월급으로 그리고 높은 수익 차에서 낮은 수익 차로 바꾸는 건 어때요?' 하고 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마을에 있는 보석 가게마냥 에이즈 치료약을 판매하는 것을 중단하고, 큰 식료품 가게처럼 운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희가 했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가격은 1년 1인당 500달러에서 140 그리고 120달러로 내렸습니다. 아이들의 에이즈 치료약은 1년 600달러에서 120달러, 90달러 그리고 60달러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에서 약을 받는 세계 모든 사람들의 절반은 이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약을 받는 모든 아이들 중 3분의 2도 이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더 빠르거나 싸거나 혹은 더 좋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일은 비정부적 기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기후 변화가 맞서 싸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든지 못하든지, 기후 변화의 효과를 상쇄하도록 도와주는 큰 규모의 태양열 프로젝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깨끗한 전기의 원천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는 어린이 비만과 싸울 때 학교의 자동판매기의 칼로리 함유량을 58%로 감소시키기 위해 탄산음료 회사와 협상을 하면서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저희는 저희가 그들 모두가 이렇게 하고, 같이 시작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는 미국의 학교들 중 80%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또한 비정부적 기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단계까지 비정부기구의 전통적 역할이라는 것을 대표합니다.  
모든 비정부적 기구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의용 소방대가 시작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어진 역사에서는, 비록 경제가 예전과 다른 없이 진행되고, 여러분들이 투표한 모든 사람이 당선이 되고, 그들이 여러분들이 그들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을 하는 시간이 오더라도, 사회적 구조에는 항상 차이가 있고, 민간 주도의 기업이 생산하는 것과 정부가 공급하는 것에도 항상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비정부적 기구의 역할은 그 공간을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행해지는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혁신, 에이즈 치료약 샘플, 그리고 통합입니다. 저는 저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에게 돈을 잃느냐고 결코 묻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돈을 버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에이즈 제조회사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부가 저를 불러서 자기네는 전혀 부패 정책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지 않는다면, 그런 국가에는 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돈을 훔치거나 아이들을 죽이는 그 누군가를 본다면, 저는 거기에서 나올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저희는 정부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고, 덜 이로운 방식보다 사회적으로 이로운 방식으로 돈을 버는 민간 부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티 지진이 발생하고 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십시오. 처음으로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조지 클루니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티에 희망을' 이라는 이 환상적인 콘서트를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 이내로 준비해서 6,600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모금된 돈에서 대부분 10달러미만의 돈은 금방 벌어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티라는 단어를 핸드폰에 치면, 자동적으로 10달러가 여기로 송금되거나 캐나다로 5달러가 송금됩니다. 환상적입니다! 대부분의 돈은 인터넷을 통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6,600만 달러라는 수치 중에서 극히 소수만이 10만 달러나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지불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 혹은 그 미만을 지불했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 이 거대한 양의 돈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갑자기 저에게 제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부터 의사진이 오셨습니다. 그러고서는 저를 불러 놓고 어떤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고작 5일 동안만 그곳에 있을 수 있었는데도 저를 보냈습니다. 그 그룹 중 두 세 명은 제 특별한 친구이기도 했고, 의료에서 파트너를 운영하는 Dr. Paul Farmer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또 제 유엔 보조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실 겁니다. 그들은 거기로 보내졌고, 그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서 말하길, "여기에는 36개 항생제와 우리가 필요한 다른 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개의 스탠딩램프를 가져오세요. 비록 월마트에 가서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죠. 그리고 그것들을 작용시킬 수 있는 발전기도 가져오세요. 그래야 24시간 하루 종일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는 아이들이 폐혈증으로 부터의 감염 때문에 심한 고통 속에서 죽고 말 거예요." 그래서 전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것이 비정부적인 그룹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분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정치성향이 어떻든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간에 말이죠. 제가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Dick은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매년 유엔 오프닝 행사에서 저희들은 이틀 반 동안 자선가, 기업가, 비정부적 기구들, 그리고 UN에서 나타나는 세계적 리더들을 초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저희들은 모여서 세계에 직면한 중요한 도전들을 충족시킬 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UN사무총장이나 미국 대통령이 오면 그들만이 연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0분 이상 연설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21세기에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제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는 대화입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는 정치얘기에 연루 되어 저희들은 3가지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공공에서 할 것인가, 민간 부문에서 할 것인가?, 어느 정도 비용을 사용할 것인가? 저희가 글로벌 이니셔티브에서 하는 것은 4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든 간에, 여러분이 제안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좋은 의도를 긍정적인 행동으로 바꾸기 위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기후 변화 지역에서 우리가 에이즈 치료약을 가지고 일을 하는 아날로그가 무엇입니까? 보건 지역에서는 의료 시스템을 설치할 때 무엇이 아날로그입니까? 여러분들은 교육을 민주화시키고 학교에 다니지 않지만 기능이 필요하고 그들 국가를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준에 있는 새로운 1억 명의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입니까? 어떻게요? 제 생각에서 이 '어떻게' 라는 질문은 21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판명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들이 비정부적 기구에 종사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항상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 자신들의 일은 제쳐두는 방식으로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그들의 정책을 바꾸고 민간 부문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러고 나서 여러분들은 다른 도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글자 그대로 550억 달러가 넘는 가치의 10년간의 헌신들을 얻어 냈고(도움을 받았고), 이미 2억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저희는 대학교 학생들만을 위한 것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뉴올리언스 주에 있는 툴레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처음 도와주었습니다. 왜냐하면 it was the site of Katrina 이고, 돌아오는 시작이고, 그리고 저희는 다시 가져오기 위해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지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작년에는 Austin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국가로부터 오는 어린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14명의 어린 학생들이 멀리 중국에서 여기로 왔습니다. 저희는 항상 커뮤니티 서비스 프로젝트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지금 뉴올리언스의 Lower Ninth Ward에 간다면, 거기에는 극도로 에너지 효율적이고 허리케인과 홍수에 잘 견디는 그린 하우스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브래드 피트 재단인 '바르게 살기 운동' 재단에서 지은 것입니다. 그 땅은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학생 미팅에서 저희 학생들이 깨끗하게 치운 땅에 말이죠. 작년에는 저희는 커뮤니티 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대게 히스패닉 이웃인 Austin 동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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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학생들과 악수를 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 한 어린 친구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봤는데, 그 학생은 "미얀마, 버마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저희가 그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여기 어떻게 왔어요?" 하고 물으니까, 그는 "저를 초대하셨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버마에서요?" 물어보니 그는 아니요, 저는 런던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저희가 여기 오는 데에 도와줬나요? 왜냐하면 저희는 가끔 40%의 학생들의 경비를 지원해주거든요. 하지만 그는 "아니요, 제가 스스로 돈 벌어서 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미얀마에게 런던으로 와서 지금은 텍사스 주 Austin에 있는 히스패닉 공동체 센터에 있는 거군요.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죠? 하고 물어보니 그는 제 나라가 많은 문제가 있었고 저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고치려고 해주지 않아서요. 저 같은 사람이 고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것을 고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도 진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위해 정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말입니다. 환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버클리에서 약 50명의 학생들이 이 두 개의 미팅 중 하나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매우 매력적인 헌신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학모임에서 정규 CGI에서 하는 것처럼 헌신을 해야만 합니다. 캘리포니아 공공 학교에서 패소 공원의 소규모 프로그램이나 온두라스 지역에서 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 등등이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흥미로운 헌신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큰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다음 번 모임은 4월에 마이애미 대학에서 열립니다. 4월 16일에서 18일입니다. 아이티에 관한 많은 중점이 오고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에 관심이 있다면 저희는 아직 접수를 받고 있으니 지원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3월 1일까지입니다. 지원하기까지 1주 더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원하기를 바랍니다. 직접 와서 지원하기 싫으면, 저희는 웹케스트로 지원도 받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하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이미 한 일 중 하나는 월마트와 Pat Tillman 재단을 포함해서 회사들로부터 지원금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들 Pat Tillman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이라크에서 아군의 포격에 의해 죽게 된 프로 축구 선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재단을 만들고 생존자인 어린 사람들, 전쟁에서 죽지 않게 될 사람들이 남은 삶을 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성금을 모았던, 주목할 만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가장 명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방식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와 몇몇 사람들은 학생 프로젝트 기금으로 써달라면서 저희에게 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마이애미에 올 수 있는 학생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기 싫거나 올 수 없는 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참여할 수 있고, 또한 여러분들이 직접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학생 미팅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몇몇 프로젝트에 도와주는 데에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 주소는 CGIU.org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번 들어가 보기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이제 정치에 대해 제가 몇 마디 하겠습니다. 정치는 중요합니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한 것을 기억하면, 비록 여러분들이 뽑은 사람이 다 당선이 되고 경제도 다시 상황이 좋고 여러분들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키고 싶었던 일을 그들이 다 하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민들에 의해서 채워져야 할 사회적 구조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권한을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 정보공유 그리고 네트워킹을 통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 충격적인 지진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와 저가 1975년부터 다닌 아이티의 주민들이 제 인생에 있어서 매우 좋은 기회라는 것을 정말로 믿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의 206년 역사에 있어서 그들이 처음이가 최근의 유일하게 성공한 그들의 유산의 어두운 부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예 반란으로 인해 설립된 국가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미국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50년 동안 지금까지 여전히 평화, 번영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해야만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에게는 정치적 차이를 경험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대학교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것을 전공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지금 의료서비스 논쟁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 중 하나는 오늘날 뉴스가 전파된다는 방식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오늘의 큰 헤드라인만 봅니다. 주요 네트워크 중 하나는 그들 전체 뉴스 직원을 25%로 줄였습니다. 왜냐하면 저 같이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 이상 저녁 뉴스를 보지 않고 그저 영화와 스포츠를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성 TV와 인터넷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에서 큰 분류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문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Kindles 때문에 우리는 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허락한 25개의 블로그 사이트에서 매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 남겨놓고 보게 하는 것들 중에는 좋은 추세가 있습니다. 어찌 됐든 거기에는 빌 비숍이라 일컬어지는 자유민주당원에 의해 쓰인 '큰 분류'라 불리는 대단히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He lived in a neighborhood that voted for John Kerry more than 4 to 1 over President Bush in Austin, Texas. But the neighborhood lost it's only Republican who then moved to a neighborhood that voted for Bush 5 to 1 over Kerry. 그리고 이것을 그가 사람들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리를 지어 우리를 허락한 사람들로부터 듣고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계속 우리를 화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텔레비전에서와 같은 매우 churning한 사이트를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뉴스는 여러분들이 주의력 결핍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이 증가되도록 고안된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가벼운 것을 전공하고 중대한 것을 부전공하게 하는 것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저의 긴 삶에 대해 정치라는 방식을 뛰어 넘어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저는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가 좌절하고 화가 나고 무서웠을 때 말입니다. 75% 정도는 제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부분적으로 많은 케이블 채널은 항상 우리를 좌절시키고 화나게 하고 무섭게 느끼도록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기초로 되돌아가는 것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료 서비스를 보면 이것이 기초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수입에서 의료서비스를 17.2% 사용합니다. 그 어느 부유한 국가도 수입의 11.5%이상을 의료 서비스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위스밖에 없습니다. 그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산간 마을에 살고 있고 국민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수송 시스템이 더 비쌉니다. 캐나다는 수입의 10.5%를 의료서비스에 사용합니다. 일관적으로 가장 높은 비율의 두 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모든 다른 국가들은 10%를 의료 서비스에 소비합니다. GDP에서 10%와 17.2%는 거의 1조 달러에 가까운 차이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린 1조 달러를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즉,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시스템을 채택했다면 우리는 1조 달러를 절약했을 것입니다. 그것에서 무엇을 우리가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버클리의 예산 요구, 캘리포니아 대학들의 수업에서의 수업료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그리고 아이들이 2년 과정에서 떨어져서 자동적으로 캘리포니아 주립의 학교로 오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생각해보세요. 모든 것이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39번째 유아 사망과 42번째 성인 수명 연장에 대해 1조 달러어치의 수표를 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의료 서비스 결과에서 35번째보다 더 좋게 등수가 매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들이 1세대 이민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지를 감안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좋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84%의 사람들에게 보험을 팝니다. 모든 사람들은 100% 보험에 들고 문제점을 이해합니다. 앞으로 어느 시점에서는 매년 30%의 미국인들이 의료 서비스 보장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찢으려 하는 사람들은 매우 무례합니다. 저는 1주일 정도 스텐트(혈관 폐색 등을 막기 위해 혈관에 주입하는 것, 「네이버 백과사전」)를 한 후, 어느 한 남자가 기사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여러분, 저는 빌 클린턴이 기꺼이 하려는 의료 서비스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는 데에 한 표 걸겠습니다. 또한 그가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 서비스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는 데에 한 표 걸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저희 친구들은 질겁했습니다. 자,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을 화나게 만들도록 한 의도적인 것입니다. 공공의 관심은 잊어버리세요. 그럴 일을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미국 경제를 살리고 경쟁적이고 사실 더 나은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갖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포기해야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극복을 했고 이것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미국이 앞으로 높은 교육 시스템을 유지하고 공공 교육 시스템을 향상시키고 경제를 다양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계속 우리의 경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매년 초 우리의 경쟁자들에게 1조 달러에 달하는 부도 수표를 쓴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미국의 높은 교육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겠습니다. 제가 대학에 가고 로스쿨에 가고 빚을 지고 (그것도 국채를 빚지고 완전히 갚았지만) 그런 기회가 없었더라면, 저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6--- 
제2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2001년, 제가 임기가 끝날 때까지 공화주의 정부와 민주주의 정부 둘 다 통틀어서, 좋고 나쁜 경제 통틀어서 미국은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의 비율이라는 범주에서 항상 세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1위였습니다. 하지만 10년 사이에 10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공평하게 된 것 중 하나로, 많은 우리의 경쟁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자국에 있는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난하는 걸 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다른 나라의 성공에 절대로 배 아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더 성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막 냉전시대가 끝난 21세기에서 단지 3억 3천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단독적으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초강대국이 될 방법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두주자가 되어야 하고, 기회와 변화의 신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달 시스템이 지쳤기 때문입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난 뒤, 대학교 학비는 최근 10년 사이에 75%가 올랐습니다. 인플레이션 발생 후 의약품은 2000 달러로 떨어지는 동안에 말이죠. 만일 사람들의 수입이 오르고 우리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마련했더라면, 우리는 가격 상승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실들을 부인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 전달 체계와 교육 전달 체계와 관련하여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보다 에너지 효율적인 국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태양열, 풍력, 지열 에너지를 믿습니다. 즉, 이 에너지를 통해 일자리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오늘날 일자리를 필요로 합니다. 이 에너지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석탄 공장에 매 10억 달러를 투자하면 그로 인해 여러분들은 870개의 직업을 얻습니다. 만일 10억 달러를 핵 공장에 투자하면 여러분들은 1000개 혹은 1500개의 직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10억 달러를 태양열 에너지에 투자한다면 1900개의 직업을 창출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풍차를 만들고 조립해서 완성한 뒤 설치하는 일을 하면 3300개의 직업을 창출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10억 달러를 빌딩을 건설하는 데에 투자하게 된다면, 7000개의 직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건설업에서의 실업률은 17%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바꾸게 되면, 이 세상에서 경제적 삶이 끝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진실은 미국과 21세게 전 세계에 걸쳐서 번창하고 세계에 기반을 둔 경제라는 단 하나의 티켓에 있습니다. 왜 그 어느 누구도 코펜하겐에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저는 아무도 말을 하려 하지 않아서, 얼마나 끔찍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코펜하겐에서 승인서에 서명을 하지 않을 때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던 즉, 손을 떼고 관여하려 들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모두 불편한 진실에 대해 지적을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비꼬며) 이제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그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 되세요. [웃음] 앨 고어와 제가 교토 조약을 끝마쳤을 때, 우리는 서로 그 일을 마치는 것을 도왔습니다만, 어쨌든 끝마치고 그는 일본으로 갔습니다. 사실 협상을 마무리하러 간 것이지요. 우리는 기후 변화에 관한 일을 할 때 의회에서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의회에 법안을 제출하기 전에 제가 의회에서 일어버린 유일한 법안입니다. 앨 고어가 비행기에서 내려서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상원은 98:0의 투표로 교토 조약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왜 반대를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기후 변화가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만일 우리가 대기에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내뿜지 않게 된다면 즉, 석유 석탄과 같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자가 되거나 더 부자가 되거나 혹은 우리 삶의 기준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당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토 의정서에 서명을 한 44개의 부유한 국가들은 앞으로 2012년까지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각 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지 4개국만이 이를 지킬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가 어디냐고요? 덴마크, 스웨덴, 영국 그리고 독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교토 의정서를 지킬 것을 압니다. 2008년 9월 18일에 시작된 경제 붕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 4개국은 우리보다 실업률도 낮았고 성장률은 높았으며 수입 불균형은 우리보다 덜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자리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과,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바꾸는 헌신을 함으로써 나타난 새로운 일자리 때문입니다. 지금 영국은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더 leveraged하고 규제가 덜합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독일은 우리보다 상당히 낮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이치 은행은 최근 독일의 태양열 정책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린피스가 한 것이 아니라 도이치 은행에서 한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들이 말하기를, 심지어 독일을 세계에서 태양열을 사용하는 가장 첫 번째 사용자로 만들도록 하는 데 들어간 보조금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모든 국가의 평균 일조량이 영국의 런던에서의 일조량과 같을 때, 그들은 30만 개의 일자리라는 이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1인당 추정을 하면 태양열만으로도 120만입니다. 그러나 작년에 다양한 국가들의 상대적 수용력을 추정하는 과학적인 조사가 발표되었습니다. 국가들이 태양열을 변환시키고 풍력을 변환시키는 것을 수용하는 능력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조사에서 미국은 태양열을 수용하는 능력에서 1위를 차지했고, 풍력을 수용하는 능력은 3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제대로 된 논의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청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시민권을 잊지 말고, 옹호하는 것을 잊지 말며 일하는 것을, 그리고 제발 투표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주세요. 왜냐하면 최근 3개의 선거, 2개의 주지사와 매사추세츠의 상원 선거가 가장 큰 패턴이기 때문입니다. 이 3개의 선거에서는 정당 차이는 없었는데, 젊은 사람들의 투표율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들 중 하나는 여러분들이 일을 한 것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입증하는 것이라는 것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즉, 투표를 해서 입증을 하세요.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과 경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다는 두려움은 최고로 좋은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증명된 물리적인 징후로 인해서 말입니다. 저 같이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처우를 해주지 않는 이상 의료 서비스를 바꿀 수 없다는 두려움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것을 증명함으로써 반박을 당하지 않도록 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두려움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아이티,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그 어느 곳에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여러분들의 좌절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인류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혹은 그녀가 진짜 공산주의자라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기꺼이 공동의 목적을 만들고 사실을 보고 사소한 것을 전공하지 않는 개인적 시민은 그 어느 때보다 어떤 일의 결과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라는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기꺼이 여러분 자신들이 그 대열 속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운을 빕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제 것이에요? 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 부패한 사람이군요.(농담) 저는 이런 거 받는 거 매우 좋아합니다.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둘 다 자부심을 갖고 만약에 집에서 있는데 추우면 입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SELFSHIP
Web Search/Synergy2010. 8. 6. 20:25



   오프라 윈프리가 권하는 성공 10계명

1.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 살지 말라.

2.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것들에 의존하지 말라.

3.일과 삶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라.

4.주변에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

5.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라.

6.중독된 것을 끊어라.

7.당신에게 버금가는 혹은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라.

8.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면 돈 생각은 아예 잊어라.

9.당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말라.

10.포기하지 말라.

헤네시 총장님, 재단 이사와 학부, 전 교직원 여러분과 여기 계신 부모님과 조부모님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졸업생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멋진 날을 여러분과 함께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먼저 저는 한 가지 비밀을 모두에게 알리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 비밀은 제가 08년도 스탠포드 졸업생인 커비 범퍼스의 대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헤네시 총장님이 제게 졸업식 연사를 부탁하셨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커비가 여기 다닌 이후로 제가 처음 학교에 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또한 마침내 4년만에 그 애가 생활했던 방을 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제가 가장 있고 싶은 곳은 바로 이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인체 생물학과 심리학 2가지 학위를 받아 졸업하는 커비가 너무 자랑스럽기 때문이죠. 
 
그리고 커비의 부모님과 그녀의 오빠 윌이 그녀가 이 시간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녀가 스탠포드를 졸업하는데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누군가 제게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저는 말했습니다. “스탠포드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스탠포드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단어입니다. 사실 저는 학위를 절대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탠포드에 간 적이 없습니다. 저는 테네시 주립 대학에 갔습니다. 하지만 학위는 따려 하지 않았죠. 저는 1975년 졸업까지 단 한 학점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전 그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전 친구들과 함께 졸업식 행진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 당시에 저는 이미 방송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9살인 2학년 때부터 방송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밤 10시 뉴스를 하면서도 유일하게 11시 통금이 있는 앵커였습니다. 
 
정말 저희 아버지는 “흠, 뉴스가 10시 반에 끝나니까 집에 11시까지 오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니까요. 전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생각했죠. 겨우 한 학점만 모자라는 건데 대학일은 그냥 잊어버리자고요.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그 뒤 몇 년 간 언제나 제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졸업을 않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오프라 게일- 저의 중간 이름입니다.” 하시면서 “대학교 졸업 학위 없이 네가 앞으로 뭘 할지 모르겠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지만 아버지 전 이미 TV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요”라고 했죠. 
그러자 아버지는 “흠, 난 그래도 네가 대학교 졸업장도 따지 않고 앞으로 뭘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제가 “하지만 아빠 저는 지금 토크쇼 진행자라고요.”라고 하면 아버지께서는 “대학교 졸업장 없이 다른 직업을 갖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하셨습니다. 
 
1987년 테네시 주립 대학에서는 졸업식 축사를 제게 부탁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세계적으로 방송되는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전 오스카 시상식에 후보작으로 올랐던 영화를 만들었고 제 회사 Harpo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테네시 주립대학 측에 제가 한 학점을 이수하지 않으면 그곳에 가서 연설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가 아직도 저에게 대학 졸업장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저의 대학과정을 끝마쳤습니다. 기말 페이퍼를 제출하고 학위를 따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한 학점이 저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전 아버지가 왜 졸업장을 따라고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재즈 뮤지션 바비 킹이 말했던 것처럼 배움의 아름다움은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죠.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배움이라는 것은 아주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여러분이 받는 교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까요. 어떤 면에서는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세계는 여러분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전 이 세계, 이 우주를 학교와 학급생활과 같이 생각합니다. 가끔은 이 곳 지구라는 학교에서 교훈은 우회로나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위기로 다가올 때도 있을 겁니다.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배워온 비밀은 교훈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자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우주로부터의 교훈을 말이죠.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고 여러분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은 여러분을 가장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진짜 이유입니다. 우리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이해와 열정, 발전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제가 들었던 가장 좋은 칭찬이 생각납니다. 제가 처음 시카고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어떤 리포터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전 이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제게 하는 말이, “그거 아세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어요. 더 오프라다워진 것 같아요.”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점점 더 자신다워지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하는 일과 경험하는 것들 모두에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훈을 얻는 것은 여러분을 앞으로 진전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풍부하게 하는 일입니다. 전 확실히 내면의 지혜가 부를 갖는 것보다 더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혜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인생의 여정에서 배웠던 세 가지 교훈입니다. 기쁘죠? 누군가 몇 가지 말한다고 해놓고 10가지를 말하면 싫죠? 여러분들은 이럴 겁니다. “이거보세요, 제가 졸업하는 거라고요. 당신이 아니고요.” 그래서 세 가지만 말하려고 합니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교훈은 직감과 실패 그리고 행복을 찾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대학을 떠난 지 일 년 뒤 발티모어에서 6시 뉴스 공동 앵커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출연할 당시 방송계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큰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발티모어는 나쉬빌보다 훨씬 규모가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2살에 그곳에서 6시 공동앵커를 맡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전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침내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TV에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를 따라하려고 애썼습니다. 전 22살에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인턴사원이었던 지금 저의 가장 친한 친구 게일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22살 밖에 안됐는데 2만 2천달러를 벌다니! 마흔 살이 되면 4만 달러를 번다고 상상해봐!”라고 하곤 했습니다. 
 
제가 40살이 됐을 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매우 기뻤습니다. 
 
22살이었던 제가 그곳에서 한 해에 2만 2천 달러를 벌면서도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첫 번째 이유는 방송국에서 제 이름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뉴스 감독님이 제게 “아무도 오프라를 기억하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사람들이 기억하고 좋아할 만한 이름을 생각했는데 친근하게 수지 어때요?”라고 하셨습니다. 
 
안녕 수지. 매우 친근하죠. 수지에겐 아무도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지를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수지가 아니었습니다. 전 자라면서 제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도시락 통이나 열쇠고리를 찾을 수는 있어도 오프라라고 쓰여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전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 글쎄, 이건 내 이름인데 그리고 수지가 나한테 어울릴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게 맞지 않다고 말이죠. 전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에 대해서도 맘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1976년에 여러분의 상사가 여러분을 불러서는 “외모가 맘에 안 드는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소송감이지만 그 당시에는 외모가 맘에 안 든다고 그냥 내뱉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들 중 몇몇이 당시로 돌아간다면 바바라 월터스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저에게 미용실로 가서 파마를 하라고 했습니다. 몇일이 지나고 저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머리를 아예 밀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가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흑인인데다가 삭발을 하고서는 TV에 앉아 있으니 썩 보기 좋진 않았겠죠. 
 
제가 삭발을 한 것보다 더욱 싫었던 것은 제가 매일 다른 사람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만 봐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의 모든 본능은 제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한다고요. 
 
헤네시 총장님께서 말하셨듯이 저는 화재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 희생자들에게 돌아가 담요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날마다 보도하는 모든 사건들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반면 저는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우아하게 앉아서 말하려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바라를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다면 훌륭한 오프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바라처럼 우아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고 가끔 대본을 따라서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내면에서 즉흥적으로 해야 한다고 소리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뉴스를 사람들에게 보도하면서 저도 그 뉴스를 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마치 머릿속 고속도로에서 6중 추돌사고가 난 듯해서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맙소사. 
 
간혹 저는 즉흥적으로 하려고 대본대로 읽지 않고 목록에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잘못 발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대본을 읽는 데 캐나다를 ‘카 나다’로 발음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 바바라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제게 “오프라 게일, 이건 일생의 기회야. 이 일을 계속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사는 “이건 메인 뉴스야. 당신은 사회 복지사가 아니라 앵커라고. 당신의 일에 전념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기대와 의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정말 제 스스로 처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전 집에 가서 일기를 쓰곤 했습니다. 전 15살 때부터 일기를 써왔기 때문에 지금은 일기장이 몇 권 됩니다. 전 집에서 제가 얼마나 비참하고 좌절하고 있는지를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선 제 갈망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런 습관을 이 때 배우게 된 것이죠. 
 
8개월 뒤 저는 앵커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방송국 측에서는 제가 과도하게 감정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위약금을 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토크쇼로 배정했습니다. 그 때 그 쇼에 앉아서 저는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TV가 단순한 놀이터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람들을 돕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앉아서 토크쇼를 진행할 때 비로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왔던 모든 것이 시작된 계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이것이 옳다고 느껴질 것이고 얼마를 버는지에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보너스라는 것이죠.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이걸 어떻게 아냐고요? 이건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직감이 여러분들의 삶에 위치 추적 장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여러분의 감정적 안내 시스템이 판단을 하게 해줍니다. 이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자아를 확인하는 것을 배우고, 시작하고 나서는 대신에 여러분의 배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내렸던 옳은 결정들은 저의 배짱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제가 했던 옳지 않은 결정들은 모두 제가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 때 내린 것이었습니다.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 하나가 여러분, 저의 친구들을 많은 슬픔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의심이 간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배운 교훈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냥 가만히, 아주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이 뭘 할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죠
 
여러분이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면의 동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 개인의 삶이 발전될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핑크의 베스트셀러 ‘새로운 세계가 온다’에 쓰여 있는 것처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관념적 시대’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서로 분류하는 특징은 우리의 마음, 우뇌와 머리로부터 오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그것은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고 1차적이지 않으며 규칙에 지배되지 않은 시대입니다. 감정적이고 즐거우며 훌륭한 가치를 지닌 내면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신의 일에 완전히 몰두할 때 우리의 전문성과 감정을 자라나게 합니다
 
지름길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날고 싶다면 여러분의 열정의 힘을 기르세요. 스스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세요. 모든 사람들은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면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여러분이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돈과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있는 것이길 원합니다. 의미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진정으로 풍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첫 번째 교훈은, 항상 마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맞다’라는 느낌이 들면 밀어붙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마세요.  
 
자, 이제 실패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릴게요. 그 누구의 삶도 흠집 없이 순탄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비틀거리며 고난을 맞기도 하죠. 일이 잘못되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겁니다. 그건 바로 삶의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인생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 실패할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그렇게 합니다. 모든 어려움, 고난, 힘든 시기에 저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왔을까?' 라고 물어요. 그리고 교훈을 얻자마자 여러분은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진정한 교훈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이수했으며 재수강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교훈을 얻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나타날 거예요. 여러분에게 보충할 수 있는 숙제를 주기위해서 말이죠.  
 
또 제가 알게 된 것은, 어려움은 여러분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오며 그때 인생이 속삭입니다. 네, 인생은 당신에게 먼저 속삭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그 속삭임을 무시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외침으로 변하죠. 여러분이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옳은 질문을 하세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가 아닌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를요. 이것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그래야 당신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각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지구’라는 아주 훌륭한 책을 쓴 저의 지인인 에크호트 톨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그 상황과 함께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해결책은 도전에서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순히 따르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시고 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아프리카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저는 남아공 소녀들에게도 스탠포드와 같은 멋진 미래를 주고 싶었습니다. 학교가 학생들만큼 아름다울 수 있도록 5년이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좋은 환경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모든 청사진을 점검하고 베개도 직접 골랐습니다. 벽돌사이에 들어가는 메지도 살펴보았죠. 심지어 침대보가 몇 수 인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9개의 지방에서 소녀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저는 예상치 못한 위기와 직면했습니다. 기숙사 사감 중 한 명이 성추행 용의자라는 것이었죠. 
 
그것은 정말 악몽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전 그 소식을 듣자마자 30분간 흐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울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30분 동안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당시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동 전문 심리 치유 상담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조사팀을 꾸려 여학생들이 확실하게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일과 함께 남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저는 계속 제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상황이 나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경험은 정말 가슴 아팠지만 저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외부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었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는 이 교훈은 우리들 모든 삶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됨됨이, 삶의 질,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학생들도 여기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에 대처하는 힘이 생겼고 자신의 목소리가 힘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보여준 회복력과 정신력은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었고 이것이 제가 말하려고 하는 마지막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찾기’입니다. 이것에 관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에게도 다른 할 일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주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간단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웬도린 브룩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쓴 시 ‘젊은이에게 고함 - 전진할 이에게 고함’의 마지막에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살지 말아라, 결과를 위해 살지 말라, 과정을 위해 살아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녀는 앞서 말한 에크호트 톨처럼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순간에 있어야합니다. 인생은 현재형이기 때문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현재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라는 말도 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은 어려분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상호 교환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베풀어야합니다. 
 
이런 정신은 이미 이 대학에 뿌리 깊게 내려있기 때문에 이미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훈은 이 대학을 설립한 스탠포드 부부가 깨달았던 것이고 또한 여러분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학교가 어떻게 설립 되었는지, 스탠포드 부부가 어떻게 해서 15살 난 외동아들을 장티푸스로 잃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당시 이들 부부는 세상에 등을 돌릴 충분한 권리와 이유가 있었지만 대신 그 슬픔과 고통을 선행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그 해에 이들 부부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자녀에게 베풀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여기서 교훈은 명확해집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세요. 고통 받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서 여러분 스스로도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위대한 동반자’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과 봉사정신을 가진 모임이죠. 
 
스탠포드 부부는 다른 부모들이 견뎌왔던 것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점점 과학적, 사회적 연구가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느낌을 얻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 좋은 일을 하세요. 
 
그런데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한다면 봉사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좋은 느낌 그 이상의 것을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선행은 확실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주니까요.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봉사 정신으로 임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분명 더 가치 있어질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행복해질 겁니다.  
 
전 토크쇼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제가 단순히 TV에 출연하고 TV를 일로써 이용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청자들에게 봉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자 그 행복은 성취와 기쁨의 깊이에 다다르고 이것은 여러분에게 설명하거나 측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성공의 궤도가 바뀐 것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배우라면 예술에 가장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배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부학자라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지식과 봉사의 수단이라 여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사 학위를 받는데 경영학, 법학, 공학, 인문학, 과학, 약학 등 그 어느 분야에 있다고 해도 봉사 정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여러분의 기술과 재능으로 이를 행한다면, 여러분의 직업은 선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탠포드에서 이런 시간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그 풍요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더 좋은 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틴 루터킹 목사의 명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야기의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몰라도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유명세는 짧은 여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화장실까지 쫓아와 여러분이 아무리 조용히 소변을 보려 해도 그 소리를 듣고 ‘어머나 소변 본 사람이 당신이었군요.’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이라는 짧은 여행입니다. 이래도 여러분이 유명해지길 바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위대해 질 수는 있다. 왜냐하면 위대함은 봉사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것의 나머지 구절도 알 것입니다. 그는 ’봉사하기 위해 대학 학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봉사하기 위해 표준어를 구사할 필요도 없고 봉사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알 필요가 없다. 또한 봉사하기 위해 아인슈테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열역학 제 2법칙을 알 필요가 없다. 은혜에 충반한 가슴과 사랑으로 가득찬 영혼만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러분은 공식적으로 2008년도 스탠포드 졸업생이 됩니다. 
 
여러분은 그에 걸 맞는 마음과 명석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어디다 사용하시겠습니까? 학위를 받았으니 바깥세상으로 나가 교훈을 얻으십시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일들이 올 테니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함께 나눌 때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가기 전 여러분과 작은 졸업 선물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의자 밑에 제가 좋아하는 책 2권이 놓여 있습니다. 에크홀트 톨의 새로운 지구라는 책은 현재 저의 북클럽에서 선정된 책입니다. 이 책의 웹캐스트는 3000만 건이나 다운로드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책 다니엘 핑크의 ‘새로운 미래가 온다. - 왜 우뇌를 가진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가’는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지 확인시켜준 책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차를 주면 좋았겠지만 그건 제 능력 밖입니다. 축하합니다. 08년도 졸업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Posted by SELFSHIP
Web Search/Synergy2010. 7. 31. 08:18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William Henry Gates III, 1955년 10월 28일 ~ ) 는 미국의 기업가이다. 빌 게이츠(Bill Gates)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폴 앨런과 함께 세계적인 기업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였다. 2009년 3월 11일 포브스지에 따르면 빌게이츠의 재산은 약 400억달러로 세계 1위 부호 자리를 카를로스 슬림 헬루(현재 3위)로부터 탈환했다.

빌 게이츠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두 사람은 1970년대 중반 앨테어 8800에서 동작하는 앨테어 베이직(Altair Basic) 인터프리터를 고안했다. 앨테어(Altair)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로 평가 받는다.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학습용으로 개발된 배우기 쉬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식에서 영감을 얻어, 폴 앨런과 함께 새로운 베이식(BASIC) 버전을 개발하여 MS-DOS의 핵심적 프로그램 언어로 채택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한데 힘입어 MS-DOS의 지위는 공고해졌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의 주도권을 얻게 되었다. 이후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운영체제인 윈도 95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며 세계 최고의 부호로 등극하였다. 지금은 엄청난 돈과 명예로 남을 돕는 사업도 하고 있다. 2007년 6월 7일 명예졸업장을 받게 된다. 2008년 1월 24일에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기업에게 복지의 의무를 주장하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하였다.

빌 게이츠는 2000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경영자 직책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회장직과 더불어 최고 소프트웨어 아키텍트(chief software architect) 직책을 신설하여 맡았다. 2008년 6월 27일에 그는 공식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퇴임하고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풀타임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명예 회장이다.

 빌 게이츠 명예회장의 2007년 하버드 대학의 졸업축하 연설중 핵심.

이 연설에서 그는 불공평함을 줄이는 것이 인간의 가장 높은 성과이며 우리의 최고의 지력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쳐지고 있나?를 묻는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의무가 요구 된다.” 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으로 불평등을 직시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개인들은 매우 작은 노력으로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의 소리에 고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전에 대해 답을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이 세상을 바꿔놓을 것입니다
.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재능과 열정으로 이루어 온 일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이룬 직업적인 업적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평가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러분들이 기여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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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자막 동영상을 링크하여 올리려고 했으나 파일 구하기가 쉽지않아 원문해석만 올립니다. 자조경영 배상

<하버드 대학 연설문>

Bok 총장님, Rudenstine전 총장님, Faust 차기 총장님, 하버드 법인과 감독위원회 위원 여러분, 교수위원회 위원여러분, 부모님들, 특히 이번 졸업생 여러분,  
저는 “아빠, 나는 언젠간 학교에 돌아갈 것이고 졸업장을 받을 거라고 항상 말했었잖아요” 라는 이 말을 하기 위해 30년 이상을 기다려 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의 적절한 영예에 대해 학교측에 감사드리며 저는 내년에는 제 직업을 바꿀겁니다(MS에서 물러나서 자선활동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 그리고 이제 제 이력서에도 대학졸업학위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군요. 
저는 오늘 저보다 훨씬 빠르게 학위를 취득한 졸업생 여러분들께 박수를 보내며 저에게 Crimson(Harvard 학교신문)이 하버드 중퇴자중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데 대해 매우 행복합니다. 저는 그러한 칭찬이 저로 하여금 오늘 졸업생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졸업연설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중퇴자중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제 친구 Steve Ballmer가 경영대학원을 중퇴하도록 꼬인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즉 저는 악영향이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왜 제가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초대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의 입학식에 연설을 하러 왔다면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Steve Ballmer처럼 중퇴를 해서)
 
하버드시절은 저에게 경이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학교생활은 매력적이었으며 저는 종종 제가 수강 신청하지 않은 많은 수업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도 아주 멋졌습니다. 저는 래드클리프에 있는 Currier House에 있었는데 제 방에는 항상 밤 늦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를 토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아침에 늦잠 자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그것 때문에 저는 반사회적 그룹의 리더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존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입증하기 위해 서로서로 밀착하였었습니다. 
래드클리프는 생활하기에 좋은 곳 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남자보다 여학생이 많았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수학, 과학 등 이과생타입 이었습니다. 그러한 조합은 만약 여러분들이 제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하였으나 이곳에서 저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슬픈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버드시절의 가장 중요한 기억은 1975년 1월에 일어났는데 그때 저는 제 기숙사에서 세계 최초의 개인용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소재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소프트웨어를 사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제가 단지 기숙사에 있는 학생임을 알아채고 전화기를 내려놓을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들은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한달 뒤에 연락하세요” 라는 회신을 했으며 저도 아직 소프트웨어가 덜 완성된 때라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밤낮으로 이 조그마한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주력했는데 그것이 제가 학업을 중단하고 Microsoft와의 중요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하버드시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열정과 지식의 가운데서 보낸 것들입니다. 그것은 들뜨는 일이거나 위협스런 일 혹은 실망스러운때일 수 도 있었지만 항상 무언가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일찍 학교를 떠났지만 제가 보낸 하버드시절과 그 당시 쌓았던 우정 그리고 아이디어들은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되었으며 그것은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저는 크게 한가지 후회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는 세계의 지독한 불균형, 즉, 세계 수백만 사람들의 생활을 절망에 빠뜨리는 부와 건강 및 기회의 심각한 불평등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없이 하버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하버드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의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배웠고 과학이 이룩한 진보들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통해서건, 튼튼한 공교육을 통해서건, 양질의 보건 서비스를 통해서건, 아니면 폭넓은 경제적 기회를 통해서건, 불공평함을 줄이는 것은 인간의 가장 높은 성과입니다. 전 이 나라에서,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배움의 기회를 잃는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대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전 개도국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빈곤과 질병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를 깨닫는 데에는 십 수 년이 걸렸습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은 다른 때에 하버드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시대에,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전 여러분들이 우리가 결국 어떻게 이러한 불공평을 떠맡게 되고, 어떻게 이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길 바랍니다. 상상해보세요. 일주일에 몇 시간, 한 달에 몇 달러를 기부를 위해 가지고 있고, 여러분이 그 돈과 시간을 삶을 구하고 증진시키는 데에 최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에 쓰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Melinda와 저의 경우에 그 도전은 항상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어떻게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논의 중에, Melinda와 저는 수백만의 아이들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예전에 해롭지 않게 된 질병들 때문에 가난한 국가의 아이들이 매년 죽어가고 있습니다. 홍역, 말라리아, 폐렴, B형 간염, 황열병 같은 병들 때문에 말이죠.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로타바이러스라는 질병은 매년 50만에 가까운 아이들을 죽게 만들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한 명도 없는데 말이죠. 우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린 그저, 만약 수백만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세계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한 약을 개발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고 가정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죠. 만약 여러분이 모든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고 믿는다면, 어떤 생명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고, 다른 생명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혐오스러울 것입니다.
우린 스스로에게 “이건 말도 안 돼. 그렇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일의 우선이 되는 것이 당연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이 자리의 누군가가 그러했듯 우리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물었죠. “어떻게 세계가 이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있지?” 답은 간단했어요. 그리고 가혹했죠. 시장은 이런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고, 정부 역시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은 죽어갑니다.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는 시장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체계 속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여러분과 나는 둘 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다 창의적인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시장의 힘의 범위를 늘릴 수 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아니면 최소한 생활비를 벌 수 있게 되고, 최악의 불공평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장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보다 나은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전 세계의 정부들에게 세금을 내는 이들의 가치를 보다 잘 반영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납세자들의 돈을 쓰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상업의 이윤과 정치인을 위한 투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접근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세계의 불공평함을 줄일 수 있는 지속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전에 대해 답을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이 세상을 바꿔놓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자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불공평함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니까.” 저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것 보다 더 많이 신경쓰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뜰에 같이 있는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에든, 아니든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비극을 봐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경쓰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방법을 알고있다면 우리는 행동할 것입니다. 변화의 장벽은 무관심이 아니라, 너무나 복잡한 것에 있습니다. 관심을 행동으로 전환하려면 우리는 문제를 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결책을 찾고, 영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성이란 장벽은 모두 세 단계입니다. 인터넷과 24시간 뉴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문제를 올바로 볼수있게 하는 것은 여전히 복잡한 사업입니다.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을 때, 공무원들은 즉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수사를 하고, 원인을 알아내고, 미래의 유사한 사고를 예측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잔인하도록 솔직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방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죽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절반은 이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을 구하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비행기 사고가 아닙니다. 예방할 수 있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에서 많은 것을 읽지 않습니다. 미디어는 새로운 것들을 보도합니다. 수백명의 죽음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뒤로 묻혀버려서 무시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들여다보고 이것에서 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이 문제에서 눈을 떼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첫 번째 발걸음을 뗀 것이고, 해결책을 찾도록 복잡함을 떼어버리는 두 번째 단계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려 한다면 해결책을 찾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기관이나 개인이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죠?”라는 질문에 우리가 명백하고 입증된 해결책을 언제든 내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세상에 대해 관심갖지 않는다는 것은 헛된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함은 관심갖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의 길을 표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해 그들이 관심갖는 것을 힘들게 합니다.
해결책을 찾기위해 복잡함을 없애는 것은 네 가지 예측할 수 있는 단계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목표를 향한 결심, 가장 높은 난이도의 접근을 찾는 것, 그 접근을 위해 이상적인 기술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동안에, 이미 갖고 있는 기술을 가장 현명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물과 같은 정교한것이든, 해충약과 같은 단순한 것이든지요. 에이즈 전염병을 예로 들겠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목표는 이 질병을 없애는 것입니다. 가장 고난이도의 접근은 예방하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기술은 한 알의 약으로 평생동안 면역체계를 지켜주는 백신입니다. 그러므로 정부와 제약회사들과 재단들은 백신 연구소의 기금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10년밖에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예방책은 사람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다보스 포럼에서 세계보건 분야에 패널로 참석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백만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수백만! 단 한 명의 생명을 구할 때의 감격을 생각 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 감격에 수백만을 곱해보십시오…. 그러나, 이 포럼은 정말 지루했습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가 어떤 소프트웨어의 13번째 버전을 소개하는 이벤트에서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는 그 이벤트에서 흥분으로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신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이벤트는 재미있게 만들지 못할까요? 
여러분은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들에게 영향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다면 말이죠. 그런데, 그 ‘어떻게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꽤 복잡합니다.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만, 불평등이 영원히 우리 세계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단, 그 착잡한 사실을 없앨 새로운 도구가 발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복지사업 전반에 걸쳐 사용 될 것이며, 지금 그리고 과거와 다른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것입니다. 생명공학,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이 시대의 계속되는 혁신은 극심한 빈곤과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죽음을 종식시킬 기회를 줄 것입니다.  
60년 전, 조지 마샬이 졸업식에 와서 전쟁 이후의 유럽 국가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언론이 대중에게 알리는 사실들이 엄청나게 복잡해서 길거리의 보통 사람들이 현 상황을 명백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써, 대중들이 우리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란 실로 불가능 합니다.” 마샬의 연설 이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제 동기들은 저 없이 졸업을 할 때는, 세상을 더 작게, 개방 되어 지게, 눈에 보이게, 그리고 교통이나 통신과 같은 거리를 좁혀주는 기술이 출현하고 있었습니다. 
값싼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은 배움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는 강력한 네트워크 기술의 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마법 같은 네트워크 기술은 단지 거리를 없애고 모든 사람을 당신의 이웃으로 만드는 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같은 문제에 대해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키고 더 큰 혁신을 이끕니다. 그런데, 동시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기술에 접속하여 있어도 5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즉,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이 토의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지식과 관련 경험을 가진 똑똑한 사람들이 그들의 재능을 연마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로 세상에 기여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술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보는 타인에게 베푸는 일에서의 혁신을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보는 단지 국가정부 차원이 아닌 대학교, 회사, 중소규모단체 및 심지어 개인들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을 위한 접근법을 모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조지 마샬이 60년 전 언급했던 빈곤, 기근 및 절망을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세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버드 가족 여러분, 여기 캠퍼스는 전 세계에서 모인 인재들의 집합소 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일까요? 
여기 하버드 교수 여러분, 동문, 학생 및 기부자 분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본인들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버드가 하버드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삶을 증진시키는데 그 지식을 바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하버드 지식의 선도자이신 학장님과 교수님들께 요청합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교수를 영입하거나 종신 교수권을 받거나, 교과과정을 검토하거나 각 학위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결정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의 최고의 지력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쳐지고 있나? 
하버드는 교수들이 세계 최악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고민하도록 권장하고 있는지? 하버드 학생들은 글로벌한 빈곤이나, 만연한 배고픔, 물 오염, 학교에 못나오는 여학생들 및 우리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은 아이들 등에 대해 배우고 있는지? 
지구상 가장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최저의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배우고 있는지? 
이것들은 어떤 미사여구의 질문들이 아니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철학을 가지고 답변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곳에 입학이 결정 나던 날 자긍심에 넘치셨던 제 어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많이 베풀라는 압력을 저에게 넣었습니다. 제 결혼식 며칠 전 그녀는 결혼 전의 신부이벤트를 주관하면서 멜린다에게 쓴 편지를 큰 소리로 읽으셨습니다. 그 당시 제 어머니는 암으로 고생하였는데 그녀는 편지에 담긴 내용에서 다시 한 번 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즉, 편지의 말미에 그녀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의무가 요구 된다.” 라고 썼습니다. 
여러분의 이 캠퍼스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들을 생각해보면 재능, 특권 및 기회 등 세계에서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권리에는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약속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여기 모든 졸업생 모두가 심각한 불평등 같은 복잡한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 전문가가 되기를 권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향후 경력의 중심에 항상 이것을 둔다면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향을 미치기 위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매주 몇 시간 여러분들은 엄청난 파워의 인터넷에서 지식을 쌓고 동일한 관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장애물을 파악 한 다음 그것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 됩니다. 
복잡한 현실이 당신을 멈추지 못하게 하십시오, 행동하는 사람이 되시고 불평등을 직시하십시오. 그것은 당신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은 정말 환상적인 시대에 사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버드를 떠나게 되면 여러분들은 우리 세대의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술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몰랐던 글로벌한 불평등에 대해 인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지를 바탕으로 여러분들의 매우 작은 노력으로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의 소리에 고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희 세대보다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조속히 시작하시고 그리고 오래도록 지속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여기 하버드에 돌아와서 여러분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이루어 온 일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이룬 직업적인 업적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평가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러분들이 기여했는지를….. 
감사합니다.

Posted by SELFSHIP
Web Search/Synergy2010. 7. 31. 03:41



스티브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 2월 24일 ~ )

애플CEO로, 현재 컴퓨터 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했다.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하였다. 또한, GUI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5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사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사가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사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사가 혁신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거두게끔 이끌었다.

잡스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최근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며 디즈니 사의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자조적인 삶이 내면에서 느껴지고 진한 감동을 간추려 놓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의 2005년 졸업 연설문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가슴에 품어야 할 말입니다.
잡스는 삶에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풀어왔으며 어떠한 삶의 자세로 임하여 살아왔는지 잡스의 삶의 철학을 아래 원문으로 볼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꼭 잊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자조경영 배상.


<스탠포드 대학 졸업 연설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 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 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 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 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Posted by SELFSHIP
Web Search/Synergy2010. 7. 26. 19:03


영국의 대표적인 모험가이며 Virgin Group 총수, 리처드 브랜슨-Rechard Branson. 버진그룹은 음반, 콜라, 콘돔, 금융, 화장품, 미디어, 철도, 의류, 항공 등 무려 350여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서장애증(난독증)에다 최하위 성적으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버진그룹은 특이하게 주식회사가 아니다.

"개인회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규칙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가장 최선의 방법을 취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모험과 도전을 좋아한다.

"내가 하면 안 되는 올바르고 타당한 이유들은 많았다. 반면에 도전해 보겠다고 하는데는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도전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해 뿌리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잘하고 싶으면 빈틈없이 계획을 짜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조건 하라.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지 못한다면 목표가 무엇이든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일과 재미는 조화롭게 한다.

"휴식도 좋고 휴일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하든 간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즐겨야 한다. 일을 통해 영감과 만족감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 그런데 지겨운 일을 한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일과 즐거움 사이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친구도 사귀어라.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도 즐겁게 지내라. 그런데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면, 직장과 개인생활을 분리시키고 당신만의 시간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사장이나 회사가 당신이 즐길 수 있는 돈을 대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좀 더 행복해질 것이고, 삶과 일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러다 보면 승리자도 있고, 패배자도 있으며, 때로는 불공평한 일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무모한 도전를 좋아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비난도 받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단순한 관심과 열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대기업을 이루어냈다.
버진 그룹의 회장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은 우주여행을 꿈꾸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를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지구를 떠나 우주로 인간의 활동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거대한 모선을 이미 공개 했으며, 상상의 우주여행을 실현시키고 있다.

 
(우주비행장을 닮은 공항. Richard Branson’s Virgin Galactic. Spaceport by Norman Foster.) 
 
삶에 대한 태도는 현실에 닥친 일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은 피한다.
공정하게 임한라.
끊임없이 목표를 설계하고 전진한다.

삶과 열정이 나의 삶에도 있는지 한번 생각하고 반성해볼 것이며, 원하는 인생을 과연 자신의 뜻데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누군가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동기나 열정등의 자극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 자극을 잠깐의 시간과 여운만으로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는 힘이든다. 그렇게 놓치는 수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느끼고 반성하고 그것뿐인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이루고 살아가기 힘들다. 상황에 따라 잠깐 반응하고 놓치는 그 같은 행태가 자신을 나약하고 열정없고 꿈을 잃게 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자조_ 만인지상 maninjisang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가 끄덕여질 때 그것으로 알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느끼고 안다는 것은 몸소 깨닫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조_  만인지상 maninjisang
Posted by SELFSHIP
Web Search/Synergy2010. 7. 9. 19:42

중국 윈난성 쿠징에 살고 있는 '농구공 소녀'.
세살이던 2000년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잃은 소녀 첸홍얀(Qian Hongyan)이 그 주인공...

농구공 소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세살이던 2000년,
교통 사고로 양 다리를 잃고도 가난한 형편으로 사고 후 5년동안 의족 대신 농구공을 몸에 달고 사는 모습과 사연이 BBC 등 외신을 통해 소개되면서 전 세계 네티즌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이다.

 
소녀는 2005년 전세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베이징의 한 병원 의료진의 도움으로 의족 시술을 받았고 이후 수영 연습을 시작하여 수영 선수로의 도전을 위해 매일 2000m를 수영하면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2012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것이 소녀의 목표인데 소녀의 코치는 "수영을 처음 시작할 무렵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로 인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밝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농구공 소녀는 언론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낳고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독자분들은 자신의 꿈이나 도전이나 스스로를 저버리는 인생을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삶에 대한 집념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꼭 그래야만 하는 아련한 아픔마저 스며들게 합니다.

소녀의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자연스레 들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는 그녀의 도전에서 되려 내가 부끄럽게 됩니다.


잘난 사람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대로 산다고 노래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옳치 않음을 알 게합니다.


속 좁은 사람들의 하소연이며,  

핑계되는 이의 변명거리일 뿐입니다.


보는 모습만으로도 내 삶의 질곡<梏>에 대한 오류적 판단에 깨달음을 주는 소녀여 힘을 내세요.

소녀의 모습을 보는 분들은 꼭 인사말을 남겨 주시고 성원과 갈채를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체 건강함에도 부모님, 식구들과 더불어 세상에 감사를 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변화되는 좋은 습관을 하나 배운다는 자세로 꼭 주변에 감사드리고 말씀하세요.


감사 인사하시는 분들 모두는 자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꼭 그리 될 것입니다.


감동적인 삶을 보여주는 첸홍얀의 삶과 그 가르침에 감사하며 계속적인 건투를 빕니다.

건강에 보다  더 주의하시고 소녀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Posted by SELFSHIP